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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석

[로판분석 #02] 사랑의 여러 형태 - '폐하, 또 죽이진 말아주세요'

by 칰이 2025. 10. 19.

https://chikiii-poki.tistory.com/10

 

[로판리뷰 #08] 폐하, 또 죽이진 말아주세요

기본 정보- 원작: '폐하, 또 죽이진 말아주세요' - 에클레어- 작화: 하연- 각색: 혜용- 출판사: 다온웹툰- 회차: 본편 136화 + 외전 4화- 연재처: 카카오웹툰, 카카오페이지- 유형: 회귀 줄거리햇볕 강

chikiii-poki.tistory.com

 

 사랑 앞에 무게를 매길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고 본다. 선택받지 못한 사랑은 있어도, 쓸데없는 사랑은 없다. '폐또죽'에서 소개되는 다양한 사랑 역시 그러하다. 이 글에서는 라리에트와 루페르트의 사랑이 아닌 다른 인물들의 사랑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토리의 사랑

 

 토리의 사랑은 크게 두명에게로 향한다. 주인공 라리에트와 루페르트이다. 루페르트를 향한 토리의 사랑은 불가항력이다. 루페르트의 어머니이자 황후 제노에바의 심부름꾼이었던 토리의 정체는 반세뇌 상태에서 주인만을 위해 살아가는 '크루니루카'이다. 제노에바가 아들인 루페르트에게 남긴 마지막 선물이라서, 그 주인은 루페르트가 아닌 제노에바이다. 제노에바의 소원이 루페르트가 황제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토리는 루페르트가 황제가 될 때까지 열심히 보필한다. 그리고 회귀 전 토리는 고작 하루동안 루페르트의 황후로 살다가, 루페르트의 손에 죽는다. 그 진실을 모두 아는 지금에서야 생각해 본다면, 회귀 전에는 토리만이 유일한 제 편이었을 텐데, 그런 제 편을 제 손으로 죽여야만 했던 루페르트의 심정은 어땠을까. 

 토리가 비정상적인 충성심을 보이는 것도, 루페르트가 인간으로서의 정을 여기저기 남기는 걸 꺼리는 것도 다 이런 사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의 감정을 드러낼수록, 이곳저곳 정을 붙일수록 잔혹한 황실의 권력 다툼에서 살아남기 힘드니까. 토리의 목적은 오직 루페르트의 즉위 뿐이었다. 

 

 루페르트를 향한 이런 충성심을 과연 사랑이라고 볼 수 있을까? 황후가 왜 루페르트의 즉위를 원했는지 생각해보면, 토리의 존재는 모성애와 거리가 멀었을 것이다. 사랑이라고 보기에는 과한 복수심과 동정심이 섞였다. 루페르트도 그 사실을 알았다. 이 제국의 폭군이 되지 않는다면 루페르트를 죽이는 건 토리가 될 테니까. 그러나 루페르트는 그런 폭군과는 원체 거리가 먼 사람이다. 토리의 기억 속 루페르트는 한없이 자상한 아이였으니까. 결국 제 손에 죽을 운명이라는 걸 알았음에도, 루페르트는 토리를 그의 주인 제노에바보다 아껴줬다. 그래서 회귀 전 루페르트는 토리를 죽일 수밖에 없던 거 아닐까. 죽지 못해 사는 인형을, 제가 폭군이 되지 못한다면 저를 죽이는 존재를. 루페르트도 다 안다, 토리는 저를 죽이지 못하는 것까지.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 소중해져 버려서 죽이지 못한다. 루페르트가 토리를 죽인 건 토리의 마지막 소원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 감정은 사랑일까? 서로를 너무나도 아끼지만 그 기저에 깔린 감정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동정심과 연민, 뭐 그런 것에 더 가깝다면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마치 제노에바와 루페르트의 관계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라리에트를 향한 토리의 감정은 어떨까? 

 

 토리가 라리에트를 사랑하게 된 건 예정에 없던 일이다. 토리의 존재 자체는 곧 루페르트의 즉위만을 위한 것. 어딘가 미숙한 감정을 보이는 것도 모두 이 때문이다. 그래서 초반의 토리는 계속해서 라리에트를 없애려고 했다. 루페르트의 곁에서 떼어놓거나 죽이거나. 루페르트가 라리에트와 함께 있을 때 사람의 감정을 드러내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이후에는 되려 라리에트에게 잘해줬다. 라리에트가 루페르트의 곁에 있다가 망가진다면, 루페르트도 망가져버릴테니까.

 그러나 라리에트는 토리의 진심을 알았다. 단지 그 이유만으로 저를 가까이 둔 게 아니라는 걸. 토리는 라리에트를 좋아했다. 루페르트를 망치는 존재라서 곁에 둔 게 아닌, 라리에트를 좋아해서 그녀를 지켜주고 곁에 둔 것이다. 토리라면 충분히 루페르트를 더 한 파멸로 이끌거나, 정말 라리에트를 망가뜨려서 루페르트도 망칠 수 있다. 그러나 토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루페르트를 사랑하는 라리에트가 슬퍼할 테니까. 라리에트를 위해 스스로 사라졌다. 제 존재가 그들에게는 여전히 죄책감으로 남아 있을 테니. 사랑 중에서도 참으로 지독한 순애이다.

 

르한의 사랑

 

 르한은 진작에 라리에트와 혈연관계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우연히 부모님의 대화를 엿듣고 알아버린 것이다. 르한은 회귀 전에도 라리에트를 짝사랑했고, 회귀 후에도 라리에트를 짝사랑했다. 라리에트의 친구 베아트리체의 태도가 갑자기 변한 것도, 셋이 모이면 은근 르한에게 스킨십을 하면서 과시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 것도 그 사실을 눈치챈 데다가 르한을 짝사랑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이라지만, 라리에트는 평생을 친동생으로 알고 살아왔다. 당연하겠지만 친동생한테 그런 감정이 생길 리가 없다. 남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도, 평생을 친동생으로 살아왔는데 한순간에 연심 따위가 생길 리 없다. 라리에트는 제 동생의 마음을 눈치채고 단호하게 끊어냈다. 저에 대한 감정이 정리되기 전까지는 안 볼 거라고. 

 

 르한의 감정은 어떻게 보면 기구하다. 남남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짝사랑 하는 건 전혀 죄가 되지 않는다. 본인 딴에는 그저 순수하게 좋아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라리에트는 여전히 가족으로 알고 르한을 동생으로써 잘 챙겨주었지만, 르한의 입장에서는 짝사랑 상대가 저를 보기 위해 사관 학교까지 찾아와서 챙겨주는 것이었다. 라리에트의 입장에서는 소름돋는 일이었지만, 르한의 입장에서는 풋풋한 로맨스였던 것이다.

 르한의 입장에서는 순수한 사랑이었겠지만, 작품 내에서는 르한의 행동이 마냥 풋풋하지만은 않다는 걸 보여준다. 라리에트까지 혈연의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르한은 오히려 기회라도 되는 듯 제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라리에트에게 끊임없이 그의 진심을 강요한다. 한번도 동생이었던 적이 없었다면서 항상 라리에트를 지키고 싶었다는 말을 하거나 라리에트가 숨어 살고 있을 때 루페르트에게 라리에트의 이야기를 해서 질투를 유발하는 등 본인만의 로맨스 소설을 써내려간다. 독자들의 반응은 당연히 최악. 라리에트가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벨루아'는 알고보니 저와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었고, 그들은 정말로 제 핏줄을 이용해 반역을 준비했다. 그럼에도 가문을 포기할 수 없던 라리에트는 제가 사라지는 걸 택했는데 끈질기게 쫓아와서 하는 말이 제 진심을 알아달라는 어투라니. 모든 진실을 알게된 라리에트는 황실은 물론 벨루아도 보기 싫어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향한 것이었는데 거기까지 쫓아와서 제 진심을 들이대면 그 누가 좋다고 받아들이겠는가?

 학을 떼는 라리에트의 진심은 무시한 채 르한은 또다시 자신의 감정만을 요구한다. 천천히 다가간다면 언젠가 라리에트도 받아줄거라면서 정말 로맨스 소설을 쓰고 있다. 이렇게 보면 르한은 철부지 어린애나 다름없다. 본인은 늘 라리에트에게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고, 실제로도 라리에트가 지키기보다는 라리에트를 지키는 위치로 누나와 동생이라는 관계에 얽매이고 싶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연하라면 으레 하는 생각을 르한 역시 하고 있던 것이다. 동생이 아닌 남자가 되고 싶어 그러나 상대가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제 감정을 진심이라는 핑계 뒤에 숨어서 들이대거나, 사랑한다면서 하지 말라는 행동을 계속하는 등 감정에 있어서는 여전히 어린애의 모습을 보여준다. 라리에트가 찾아오지 말라니까 정말 찾지 않고 기다려주던 루페르트와는 대조되는 모습이다. 

 

 남자주인공이 루페르트인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둘 사이의 서사를 빼놓을 순 없지만, 누누이 말했던 감정의 표현이 그 차이다. 마치 이제 우리 사이의 앞길을 막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듯 제 감정만을 강요했던 르한과 달리, 루페르트는 라리에트가 항상 최우선이었다. 모든 진실을 알게 된 라리에트를 죽을 위기에서 구했을 때도, 루페르트는 제 감정보다 라리에트가 더 중요했다. 제 감정 따위는 없는 셈 할 테니 그냥 옆에 있으면 안 되냐고, 라리에트를 사랑하지 않을 테니 옆에만 있어달라며 애원하는 루페르트와 그런 루페르트를 보고 죄책감에 죽을 거 같던 라리에트의 감정선은 르한과 라리에트 사이의 감정선과 대조되는 확연한 차이점을 보인다.

 

 르한의 감정을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다만 그 방식이 잘못되었을 뿐이다. 라리에트 앞에서만큼은 동생이고 싶지 않던 르한이었지만, 그 감정이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제노에바의 사랑

 

 오직 벨네르니 황가에 대한 복수심으로 벨네르니 제국으로 오게 된 제노에바는 제 사랑을 포기했다. 포기 당한것이나 마찬가지지만. 윌레탄 왕국은 벨네르니 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푸른 독수리'를 이용한다. '푸른 독수리'는 윌레탄의 마이라몬테 공작가 소속 비밀 병기로, 타인의 조종을 받게 되는 고대 마법에 걸린 존재들이었다. 이들은 공작가 사람에게 행동, 생각, 그리고 감정까지 통제당할 수 있다. 제노에바는 마지막 남은 '푸른 독수리'였던 것이고, 오직 벨네르니 황가를 무너뜨리라는 세뇌만 가득한 채 제 사랑을 떠나 벨네르니로 오게 된다. 제가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존재는 잊고, 벨네르니 황가의 몰락만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루페르트를 제노에바는 사랑할 수 없었다. 애초에 황제는 자식을 만들지 못하므로, 루페르트를 비롯한 모든 황자/황녀들은 황제의 자식이 아니었다. 제노에바의 복수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황제의 핏줄이 아닌 제 자식을 황제로 올린다면, 그것이 바로 복수 아닐까? 제 자식을 사랑할 순 없었지만 연민할 수는 있었던 제노에바는 그렇게 루페르트를 복수를 위한 도구로 활용한다. 

 루페르트가 연금술을 시작하게 된 것도 제노에바였다. 뭐라도 잘하면 어머니가 기뻐하지 않을까, 어머니가 한 번이라도 더 봐주지 않을까 싶어서. 리뷰에서도 언급했지만, 둘 사이의 감정은 모자간의 사랑이 아니었다. 어린 루페르트는 그것이 당연한 줄 알았지만, 제 앞에서 목을 맨 어머니를 봤을 때 잘못된 것을 알았다. 그러나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었다. 제노에바에게 배운 건 황위에 올라서 복수하는 것뿐이었다. 제 어머니를 동정했던 루페르트는 어머니의 소원을 이뤄주기로 한다. 

 

 서로를 연민하고 동정했지만 서로를 사랑하지 못한 모자지간. 죽어서도 죽지 못하는 제노에바는 오직 루페르트의 세상 속에서만 죽었다. 윌레탄을 떠난 순간부터 제노에바는 그 무엇도 사랑할 수 없었다.